마을부터 화장실까지: 유니버설 디자인에 관한 두 미술관 이야기

심은주_건국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메닐 컬렉션(Menil Collection) 메인 빌딩 Ⓒ Menil Collection

메닐미술관의 뜰

미국 텍사스 주의 휴스턴(Houston)시에는 아주 특별한 미술관이 있다. 파리 퐁피두 센터 설계로도 잘 알려진 렌조 피아노(Renzo Piano)에 의해 건축된 메닐 컬렉션(Menil Collection)이 그것이다. 메닐 컬렉션은 톰블리 미술관(Cy Twombley Gallery), 댄 플래빈의 리치몬드 홀(Ricmond Hall), 비잔틴 프레스코 채플(Byzantine Fresco Chapel), 그리고 명상형 미술관의 아이콘이 된 로스코 채플(Rothko Chapel, 지금은 독립재단으로 운영 중이다) 등 여러 개의 공간들로 나뉘어 있으면서 하나의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메닐 캠퍼스(Menil Campus)의 본관이다. 대중적인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미국건축가협회(AIA)에서 완공된지 25년이 되는 건축공간 중 매년 한 곳에 헌정하는 ‘25주년 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건축계의 인정을 받고 있는 미술관이다.

메닐 컬렉션이 특별한 이유는 건축적 우수성에도 있지만 미술관에 대한 ‘마음의 단차’까지 낮춤으로써 ‘구분하지 않는’, ‘모두의’ 라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기본 정신을 돌아보게 하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Separate is not Equal”.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인종 분리 정책이 존재했었다. 버스, 음식점, 호텔, 심지어 학교까지 많은 곳에서 흑인과 백인의 공간을 분리하여 운영하였던 것이다. ‘분리는 평등하지 않다’고, 기존의 ‘분리하되 공평하게’를 전복시킨 1954년 미 연방대법원의 간결하지만 묵직한 판결문은 인종차별 반대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사회 변화는 디자인계에도 영향을 미쳐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사용성’을 추구하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1985년 탄생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포용적 디자인(Inclusive Design)’ 또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의미는 같다. 단차를 없애고 경사로를 설치하는 등 장애인 차별 금지를 기초로 물리적인 장애물들을 없애는 무장애디자인(Barrier Free Design)과 유사한 측면도 많다. 그러나 유니버설 디자인은 종교, 성별, 연령, 문화, 인종, 국적, 또는 교육 정도 등과 같은 비물리적 장애까지 고려한 보다 포괄적이고도 유연한 개념이다. 따라서 유니버설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이나 공간에 적용되는 디자인 방법 그 이상의 개념으로, 공평한 사회를 향한 디자인 운동(design movement)에서 시작된 디자인 정신(design mind)이다.

Menil Park Ⓒ Richard Barnes

그렇다면 메닐 컬렉션에 담긴 유니버설 디자인의 정신은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이야기는 프랑스 석유재벌 슐름베르거(Schlumberger) 가문의 상속녀로 소르본 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전공한 도미니크 드 메닐(Dominique de Menil)이 세계 제2차 대전 중 남편인 장 드 메닐(Jean de Menil)과 함께 미국에 이민 오면서 시작된다. 세잔느(Paul Cezanne)를 포함한 많은 예술품을 수집해온 메닐 부부는 휴스턴에 정착하게 되는데 소위 오일 머니(oil money)의 부자 주(state)로 유명한 텍사스이지만 그에 비해 예술품을 접할 기회가 적은 현실과 직면하게 된다. 이에 도미니크 메닐은 예술 후원과 인권 활동뿐만 아니라 자신의 수집품들을 더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무료 미술관의 계획을 시작하였고 그녀가 꿈꾸었던 모든 이들의 미술관을 만들기 위해 렌조 피아노와 함께 1987년 메닐 컬렉션을 탄생시켰다.

렌조 피아노의 하이테크한 건축물을 기대하고 갔다가는 낙담할 만큼 메닐 컬렉션의 첫인상은 소박하다. 메닐 공원과 연결된 단층 건물로 외장재와 색상까지 주변 주택들과 비슷하여 지역사회와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메닐 컬렉션은 고요하고 차분해 보이지만 퐁피두 센터보다 더 모던하고 더 과학적이다’라는 건축가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텍사스의 뜨거운 열기는 차단하면서도 미술관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자연채광을 부드럽게 안으로 끌어들이는 독특한 천장 구조 덕분에 내부는 밝고 시원하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의 구조설계자로도 널리 알려진 피터 라이스(Peter Rice)와 건축가와 협업의 결과물이자 이 공간의 하이라이트이다.

또 미술관 내부는 각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개방감있게 연결되어 있어서 관람자들은 답답하지 않을뿐더러 수 많은 작품들로 압도당할 일도 없다. 도미니크 메닐의 바람대로 ‘미술관 피로감(museum fatigue)이 없는’, ‘밖에서는 작아 보이지만 안에서는 넓은’ 미술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2018년 메닐 공원 안의 150년된 메닐 참나무(Menil Oak Tree)가 자연사로 잘려나가자 휴스턴 신문에 기사화된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은 SNS를 통해 슬픔을 공유할 만큼 메닐 컬렉션과 캠퍼스는 이제 그들의 일상이 되어 있다.

예술을 담는 그릇에서 예술 그 자체가 되어버린 현대의 미술관들은 많은 이들에게 ‘비일상성의 공간’이다. 그러나 메닐 컬렉션은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어 지역 속으로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되고자 하였다. 미술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 여부와 관계없이 ‘나무 그늘아래의 산책’이자 ‘피크닉하기 좋은 마을의 뜰‘이 기꺼이 되어 주고 있다. ‘모두에게 열린 미술관’을 추구하였던 도미니크 메닐의 마음은 이렇게 유니버설 디자인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휘트니 미술관의 화장실

1990년대 후반 미국 유학 시절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 ’Ally McBeal‘이 있었다. 보스턴의 법률사무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었는데 특히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화장실의 모습이었다. 남녀 구분 없이 하나의 공간 안에 여러 개의 변기들이 칸막이로만 나뉘어서 나열된 드라마 속의 사내 화장실은 성별을 떠나 전문가로 대등한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중요한 공간 장치이었다. 당시 나에게는 하나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몇 해 전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라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여기에서도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공간으로 화장실이 사용되었다. 흑인여성 전용 화장실의 간판을 부수는 케빈 코스트너의 모습은 스토리 전개의 전환 포인트이자 NASA 안에서 공식화되어 있었던 인종과 여성의 이중차별에 대해 종지부를 찍는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s

2015년 뉴욕의 휘트니 뮤지엄(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s)은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 으로 이전하였다. 새로운 미술관은 앞서 소개하였던 메닐 컬렉션의 건축가인 렌조 피아노가 설계하였는데 이곳에 성중립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미술관의 디렉터는 “우리는 오랜 기간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예술가들을 초청해 왔고 그들의 목소리를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우회적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대응하기로 하였다”라고 설치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화장실은 최소한의 존엄성을 실현하기 위해 필수적 공간으로 모두에게 같은 기능을 공평하게 제공해야 하기에 유니버설 디자인 관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접근성 못지않게 중요한 안전성이라는 유니버설의 원칙을 고려하여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국에서도 찬반의 의견들이 팽팽한 맞서고 있는 민감한 이슈이지만 다양한 성향의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미술관의 역할에 대한 많은 논의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국내에도 보기 드물지만 성중립 화장실을 올해 처음 시행된 ‘서울 유니버설디자인 대상’ 의 선정작 중 하나인 여성가정복합시설 ‘스페이스 살림’에서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여자 화장실’, ‘남자 화장실’, ‘장애인 화장실(여)’, ‘장애인 화장실(남)’, 장애인, 고령자, 유아 등 동반자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동반화장실’ 뿐만 아니라 성별구분없는 ‘모두의 화장실’과 ‘성별구분없는 장애인 화장실’까지 존재한다. 이렇게 여러 종류의 화장실들이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화장실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긴 복잡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그대로 읽혀지는 듯했다. 오래전 미국 드라마를 통해 느꼈던 그 낯설음이 상기되었다.

도시적 스케일에서부터 최소한의 단위 공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이용하는데 불편함을 최소화하기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의 기본 정신과 최근의 떠오르고 있는 민감한 이슈를 두 미술관의 사례로 소개하였다. 그런데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신문 기사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국내 미술계 최고 인플루언서로 알려져 있는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얼마 전 미국 콘서트를 마치고 미술관 투어 중이라는 것이다. 이 세계적인 뮤직 스타의 인스타그램을 살펴보니 중 12월 9일에는 메닐 컬렉션, 12월 16일에는 휘트니 뮤지엄에서의 인증샷이 올라와 있다. 조만간 이 두 미술관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말 그대로 유니버설한 장소로 뜨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