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ㄱ의 순간

예술의전당(사장 유인택)과 조선일보(사장 방상훈)는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이하여 한글을 주제로 한 특별전 <ㄱ의 순간>을 공동으로 주최한다. 현대미술과 역사유물이 만나 ‘한글’을 주제로 열리는 역대 최대 규모의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및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2021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한글의 잉태와 탄생, 일상과 미래를 예술로 조명하는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과 보물급 역사유물을 대규모로 함께 선보인다. 그간 한글을 주제로 한 전시들은 한글의 형태와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고, 서예가와 타이포그래피 작가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리고 문자예술 서(書)는 전통 미술의 핵심이었지만, 현대미술과의 관계에서는 거의 단절되었다.

<ㄱ의 순간>은 이러한 관습적인 맥락에서 탈피하여, 문자로서의 한글이 예술과 결합하는 지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한글이 탄생하는 지점부터 일상과 미래의 모습까지, 장르를 초월한 예술의 총체로 선보인다. 한글을 주제로 한 회화, 조각, 서예, 유물 뿐 아니라 영상, 음악, 향 등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작품들이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의 향연이 펼쳐진다.

유인택 예술의전당 사장은 “이번 전시는 단순히 한글을 기반으로 한 미술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라, 영상과 음악이 함께 결합한 시각예술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를 기획한 예술의전당 이동국 큐레이터는 “<ㄱ의 순간>은 말이 글이 되는 지점이다. 다양한 작가와 작품들을 통하여 언어가 예술의 본령임을 확인하고 본래는 하나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기획취지를 밝혔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보면 그야말로 화려하다. 대한민국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고 있는 김환기,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일컬어지는 박수근의 한글을 주제로 한 작품이 소개된다. 문자와 서예를 바탕으로 전 세계로 활동 영역을 넓힌 남관, 이응로, 황창배의 작품에서도 한글은 핵심이다. 이우환과 김창열 등 한국 전통을 세계에 알린 거장들의 작품들 속에서도 한글과 예술이 결합하는 지점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 미술의 현재를 이끌어가는 다양한 장르의 작가들도 한글을 주제로 한 신작들을 선보인다. 서도호는 영국에서 그의 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경험을 토대로 영상작품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만들었다. 일상과 평범함에서 예술을 이끌어내는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최정화는 아프리카에서부터 가져온 골동품과 나무뿌리에 네온사인으로 한글을 새기는 등 연작 10점 <ㄱ의 순간>을 새로 제작하였다.

올 초 열린 ‘CONNECT, BTS’전에 대한민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참여한 미디어 아티스트 강이연은 BTS와 초국가적 문화공동체인 ARMY들을 통하여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글의 모습을 시각화한 신작 <문>을 선보인다. 강익중 작가는 3인치 캔버스에 한글을 녹이는 특유의 작법을 통하여 ‘미스터트롯’의 6인방이 등장하는 <트롯아리랑>을 출품하였다.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강익중이 써내려간 트로트 가사들이 전시장 입구에서 관람객을 친절하게 맞이한다.

전 세계적으로 독특한 오디오비주얼아트 개척자 태싯그룹은 소리에서 글자로, 글자에서 소리로 변화하는 분해와 재창조과정을 통하여 한글이 예술의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쌈지길 아트디렉터로 잘 알려진 이진경은 한글을 담은 노래를 시각화한 작업을 선보인다. 관람객들은 전시실에 앉아 나무에 쓰인 노래를 직접 보고 들으며 한글을 체험하게 된다. 국악을 바탕으로 한 전방위 예술가 원일이 선보이는 음악과의 콜라보도 관객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예정이다.

지난달 새로 보물로 지정 예고된 <말모이 원고>(국립한글박물관 소장)은 개막 후 11월 22일까지만 전시장에서 관람할 수 있다. <말모이 원고>는 1910년대 조선광문회에서 주시경 선생과 제자들이 참여한 최초의 현대적 우리말사전의 원고이다. 편찬자들의 사망과 망명 등으로 출판되지는 못했으나 이후 조선어사전을 만드는 밑바탕이 되었다. 한글학회에서 1967년부터 약 25년간 제작하여 1991년 간행된 <우리말 큰사전>도 함께 전시에 선보인다. 이 밖에도 윤동주, 이육사, 신채호의 친필원고 등 어두운 시대에서 우리말과 글을 살리려는 선조들의 노력을 <ㅅ 얼> 섹션을 통하여 감상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최초로 공개되는 <표착조선인서화>는 1819년(순조 19년) 안의기 선장 등 조선인 선원 12명이 항해 중에 표류하여 일본 땅에 머물렀을 때 일본 화가가 12명의 조선인을 그리고 안의기 선장이 한글로 글씨를 쓴 한일 합작품이다. 이처럼 집단 초상화와 대자(大字) 한글 초서로 된, 그것도 본격적인 한일 합작 서화(書畫)작품은 지금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는 유물이다.

한국 문양의 보고(寶庫)인 천전리 암각화, 양전동 암각화 탁본과 가야토기, 청동거울 등도 전시되어 한글 조형의 기원을 찾아가본다. ‘붓을 든 고고학자’ 김혜련은 고대 토기의 문양에서 한글의 기원을 찾았다. 한국 기하문의 뿌리를 고조선에서부터 찾아 사각형 면적에 점, 선, 원의 요소로 다양한 문양을 발견하여 그려낸다. 작가는 이러한 공동체적 미감으로부터 한글의 조형 원리를 발견해냈다.

이번 전시는 한글의 탄생, 일상과 미래를 한글 창제에 담긴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ㄱ, ㄴ, ㅁ, ㅅ, ㅇ의 다섯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먼저 서예박물관 전관(2~3층)에서는 네 개의 섹션이 열린다.

<ㄱ – 씨> 섹션에서는 한글의 잉태와 탄생의 지점에서 소리와 문양의 관계를 통찰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훈민정음의 창제원리인 역리(易理), 상형(常形), 자방고전(字倣古篆)이 현대작가에 의해 재현된다. 김호득, 백남준, 서용선, 이강소, 태싯그룹 등의 작품과 천전리 암각화, 훈민정음해례본 등의 역사 유물이 함께 전시된다.

<ㄴ – 몸> 섹션에서는 초성, 중성, 종성이 네모꼴로 시각화되는 한글의 구조원리를 이야기한다. 한글이 자음과 모음으로 건축되고 구조화되는 모습을 강이연, 서도호, 이슬기, 박대성, 박이소 등의 작품과 함께 <도산십이곡>, <표착 조선인 서화> 등의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ㅁ – 삶> 섹션에서는 내용과 조형이 일체된 한글이 시서화(詩書畵)와 가무악(歌舞樂)의 주체로서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글은 문양, 한자, 알파벳은 물론, 몸 언어와도 어우러지며 예술언어로서의 진면목을 나타낸다. 김환기, 남관, 오세열, 오인환, 이응로, 전광영 등의 작품이 전시된다.

<ㅅ – 얼> 섹션에서는 우리의 말과 글이 일제강점기의 억압과 죽음 속에서 오히려 생생하게 살아있었음을 확인해본다. 나라를 잃은 슬픔 속에서도 우리 조상들이 지켜낸 한글의 모습을 고산금, 노주환, 박정혁, 이진경 등의 작품과 이육사, 신채호, 한용운 육필, 조선말본 말모이원고, 우리말 큰사전 등을 통하여 되돌아볼 수 있다.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에서 열리는 <ㅇ – 꿈> 섹션에서는 언어의 원형인 고고유물의 재해석을 통하여 예술의 미래를 바라보고자 한다. 울산, 고령의 암각화 가야토기, 청동거울 등 고고유물에 각인된 추상문양과 이를 재해석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한 데 어우러진다. 김혜련, 원일, 이우환, 최병소, 최정화, 황창배 등의 작품과 함께 가야토기, 양전동 암각화를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