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개발국의 문화유산 보존과 문제 해결을 위한 박물관의 역할 ①

김병연_문화재청 국제협력과 사무관

 

사진2

 

영화 <기생충>에서 봉준호 감독은 반지하와 대저택의 삶을 극단적인 미장센(mise-en-scène)의 비교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제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했을 때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이 가족 갈등의 서사에 대해 갈등이 아닌 포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고 평가했다. 봉준호 감독이 만들어낸 이 빈곤의 이야기에서 악인이나 선인은 구분할 수 없다. 오로지 개인과 개인, 가족과 가족 간의 격차만 있을 뿐이다. 영화는 그 격차의 원인이 무엇이고 또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규명하지 않는다. 어느 한 가정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우리가 영화에서 얻어낸 교훈은 ‘포용’이다.

 

하지만 빈곤이 불러온 격차의 문제는 오래된 난제이고,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19세기 제국주의 식민지 약탈에서부터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을 비롯한 이 제국주의 슬로건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게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식민지배를 겪은 피지배국을 더 가난하게 만들었다. 국제정치학의 시각에서 선진국과 저개발국 간의 격차에서 파생하는 문제들을 ‘남북문제’(north-south problem)라고 부른다. 이 말은 1959년 12월에 영국 로이드은행(Lloyds Bank) 총재였던 올리버 프랭크스(Oliver Franks)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제적 격차의 확대, 후진국의 개발원조의 문제는 남북문제로서 동서대립과 함께 현대 세계가 직면한 2대 문제이며 이제 세계의 중심문제는 동서문제에서 남북문제로 이동했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 포용이 남북문제에서 상호 발전의 과제를 부여한 것이라면, 정의는 부당한 것에 대한 해소에 있다. 포용 없는 정의는 이데올로기의 반복에 지나지 않으며 정의 없는 포용은 허구일 뿐일 테니까.

 

UN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자각심이 높아진 많은 민족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독립적인 근대국가 모형을 수립했다. 그들은 신생 독립국의 지위를 부여받았고 ‘서구적인 것이 곧 국제적’이라는 편견에 도전하면서 국제관계의 민주화를 위해 추진했다. 이들은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 UN 총회를 선전장으로 활용했다. 특히 남북문제가 단순히 경제 구조가 아닌 정의(justice)의 문제임을 확고히 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족자결(self-determination)과 인종평등(racial quality)의 법적 목표를 실현해 냈다. 민족자결권은 1966년에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과 ‘정치적·시민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 등 두 개의 UN 인권규약으로 구체화하였다.

 

정의(justice)를 위한 진전은 경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0년 UN 총회에서 ‘우호관계선언’(Declaration on Friendly Relations)이 채택되도록 했고, 신국제경제질서(a 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라는 이름으로 남북문제의 개선을 요구했다. 특히 외국의 다국적기업들이 점령하고 있던 천연자원의 국유화는 저개발국가 경제발전의 기초가 되었다. 국유화 문제는 선진국과 저개발국 간의 극심한 갈등을 불러왔으나 그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국가들이 국유화를 단행했고 1951년 이란, 1956년 이집트(수에즈 운하), 1959년~1960년 쿠바, 1963년 스리랑카, 1965년 인도네시아, 1966년 탄자니아, 1969년 볼리비아 등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들은 1973년 12월 17일 채택된 ‘천연자원에 대한 영구주권결의’(Resolution on Permanent Sovereignty over Natural Resources)와 1974년 12월 12일 채택된 ‘국가의 경제적 권리·의무 헌장’(Charter of Economic Rights and Duties of States)을 통해 국유화의 국제적 당위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문화유산 측면에서 남·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직도 시기상조였다. 1970년 11월 14일 채택된 문화재의 불법 거래 방지에 관한 ‘1970년 유네스코협약’이 그 서문에서 ‘문화재의 참된 가치는 그 문화재가 제작되거나 생성된 국가의 문화적·역사적 맥락과 연계될 때에만 진정하게 이해되고 발현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음에도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문화자원으로서 외국에 불법·부당하게 반출된 문화재의 환수는 긴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1973년 9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비동맹국가회의(Conference of Heads of State or Government of Non-aligned Countries)에서 채택된 결의안은 식민지배로 반출된 문화재의 완전한 원상회복(restitution)을 촉구하기보다는 ‘이들 국가의 고유한 인격을 보호하고 문화유산을 부흥시키며 윤택할 것을 열망한다’라는 메시지만을 전했다.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모부투 대통령 (오른쪽, 1973)
네덜란드 베른하르트 왕자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모부투 대통령 (오른쪽, 1973)

 

해결의 계기를 마련한 것은 그해 12월이었다. 자이레(현재 콩고민주공화국)의 모부투 대통령(Mobutu Sese Seko, 1930~1997)이 UN 총회에서 비로소 이 문제를 주목했다. 그는 아프리카 문화자원의 고갈에는 식민주의라는 결정적 요인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UN 총회 연설에서 ‘식민기간에 우리는 식민주의, 노예제도, 경제수탈 등으로부터 고통받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의 모든 예술품을 체계적으로 잔혹하게 약탈해 간 것으로부터 고통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경제부국들이 최고의 진귀한 예술품을 절도해서 갔고 이로 인해 우리는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가난하게 되었다’라고 비판했다. 이 배경에서 UN은 문화유산의 남·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UN 총회 결의 3187호’(ⅩⅩⅧ)를 반대 없이 113개국의 찬성으로 채택한 것이다. 이 결의는 식민지배의 결과로 예술품이 빈번하게 다른 나라로 대가 없이 대규모로 이전되었음을 지적하고 문화유산의 원상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정의(justice)의 이름으로 문화유산 분야의 남북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 결의의 직접적인 결과가 1978년에 UNESCO가 설립한 ICPRCP(문화재 반환 촉진 정부 간 위원회)이다.

 

ICPRCP는 식민지배를 통해 반출된 문화재의 기원국 반환의 동기를 부여했다.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4년 임기의 위원국으로 활동했고, 2021년까지 8차례 연임해서 활동할 예정이다. 우리나라 활동에 주목할 만한 것은 2008년 11월 서울에서 ICPRCP 설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회의와 전문가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특히 전문가회의는 11월 26일 폐막과 함께 ‘비정부전문가회의결과문’(일명 ‘서울선언문’)를 채택했는데 필자는 문화재청 직원으로 참여하여 서울선언문을 초안했다. 2008년 서울선언문은 전문과 여섯 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대체할 수 없는 유산적 상징물에 접근하고 이를 향유하는 것은 모든 민족주권의 분리할 수 없는 특성임을 밝히고 있으며, 이전된 문화재를 반환하는 것이 민족유산과 정체성을 복원하고 재건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상호 존중의 분위기에 문명 간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각 국가뿐만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 문화기관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박물관은 자료를 구매하거나 기증으로 취득하려 할 때 우선 출처(provenance)를 통해 도난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또 소장자료가 도난이나 불법 부당하게 반출된 것으로 확인될 때에는 그 자료가 유래한 국가(특히 저개발국가)와 지속해서 대화하여 우호적으로 해결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다음호에서 저개발국의 문화유산 보존과 문제 해결을 위한 박물관의 역할 ②가 이어집니다.